역시 개학은 힘들구나 휘발 직전의 단상

학생들은 악마의 모습 그대로고,, 나는 수업 준비 안되어있고,, 언제 수업 준비해서 언제 강의하지 헐...(좆망입니다..)

방학 중 마지막 사치, 자루 우동 식탐의 기록

제가 좋아하는 자루 스타일의 사누키 우동입니다. 모밀국수처럼 장에 찍어먹습니다.
이제 급식 먹을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심지어 내일 메뉴는 카레라이스라고 한다...


미국의 소비적 근대성? 텍스트라는 감옥

1944년 코카콜라 지면광고

   근대성의 근대화는 네덜란드의 상인적 근대성에서 영국의 산업적 근대성을 거쳐 미국의 소비적 근대성으로 진화했다는 것이다. ...'모두를 위한 대중소비'를 약속한 미국의 소비적 근대성은 모더니즘 건축양식에서 드러나는 안락에 대한 경멸과 대조적으로 (핵가족을 위한) 소비적 안락이 '집중된' 장소로서의 '교외 주택+쇼핑몰'로 상징되는 일상적 '안락의 민주화'를 표상한다.

  1950년대의 대중노동자는 교외로 이주해 중산층적 생활양식에 참여할 수 있었다. 자가보유는 미국 주거문화의 핵심적인 특징이 됐다. 1970년대 말 미국노총동연맹-산별노조회의 조합원의 3/4 가량이 자가 보유자였다. ... 숙련노동자의 경우 1920년대부터 교외 주택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지만, 반숙련 대중노동자의 경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대량생산된 교외 주택 '레빗타운'을 통해 교외 생활을 시작했다. 

Levittown의 대표적 이미지. 심시티 하고 싶네 갑자기.

  가정성의 이상에 걸맞은 소비윤리의 발명에도 불구하고 소비가 문화적 데카당스의 흔적에서 자유로웠던 것은 아니다. 여성은 소비자의 정체성을 가질수록 근대적 진보의 추구에는 부적절한 존재로 남아야 했다. 소비에서 데카당스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서는 소비를 합리적으로 계획된 행위로 재개념화해야했다. 예컨대 여성 소비자를 감성적인 대중이 아니라 가정을 기업처럼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가사 관리자, 즉 가족을 위한 '구매담당자'로 재정의해야 했다. (안정옥, '소비적 근대성과 사회적 권리', "미국의 세기는 끝났는가?", 99~106쪽)


주부들이 주로 시청할 것으로 간주되는 '아침 방송'은 미국식 소비윤리와 닿아있지 않을까? 

1950년대, 베트남에 파견된 중국 고문단 텍스트라는 감옥


  1950년 이후 베트민의 전쟁 전략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은 점점 강해졌다. 중국의 영향은 베트남 내부 정책의 변화에서도 감지되었다. 1950년대 중반부터 마오식 복장의 중국의 혁명 구호를 줄줄 쏟아내는 중국 간부들이 대규모로 도착하여...베트남인 동지들에게 조언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중국을 떠나기 전 류사오치는 고문단에게 중국식 기술을 베트남에게 강요하지 말라는 신중한 지침을 내렸으나, 일부는 그 지침을 무시함으로써 오래전부터 북부의 사촌 국가의 오만한 태도에 예민하게 반응하던 베트남의 하급 공직자나 간부들의 원성을 샀다.

  많은 베트남인들에게 중국의 영향력이 증대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성가신 일은 새로 생긴 당원 이데올로기 훈련 프로그램이었다. 이 프로그램의 목표는 마오의 이론에 따라 당원들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재교육하는 것이었다. ...부다렐은 이런 정책들이 두 가지 부정적인 결과를 낳았다고 지적한다. 단기적으로 볼때 많은 애국적 지식인들이 운동에 등을 돌렸으며 그 전에 당 내에 존재하던 온건파와 급진파 사이의 유대를 깨뜨렸다. ...베트민을 배반한 사람들은 그들이 운동을 떠난 이유로 마오 쩌둥 사상의 과도한 영향을 지목하는 경우가 많았다.

  중국의 영향은 농촌 마을까지 확대되었다. ...1946년 12월 전쟁 발발 이후의 정부의 토지 정책은 반봉건 혁명보다 반제국주의 투쟁을 앞세우라는 호치민의 결정을 반영하고 있었다. ...애국적 지주나 부농의 경우에는 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땅을 몰수하지 않았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진행 중인 좀 더 급진적인 토지개혁을 경험한지 얼마 안되는 중국 고문단은 베트남 간부들에게 농촌의 '봉건적' 요소들과 좀 더 과감하게 맞설 것을 촉구하기 시작했다. 감놔라 배놔라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젓가락질로 봤을때...배우신 분 류사오치.(어째 심현섭 같다)

천도교와 버트런드 러셀 텍스트라는 감옥

허수 교수는 "개벽" 표지에 다양한 이미지와 상징적 성격이 "천도교의 종교적 전통과 일정하게 관련"된다고 보았다. (출처는 국립중앙도서관)


  여기서 보았듯이 천도교 청년회 간부들이 "개벽"을 창간한 목적은 '세계개조의 동향을 주시하여 우리 사회를 개조하는 것'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목적 이면에는 이돈화가 1919년 말에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금일 이후의 개조는 반드시 종교적 개조가 되리라'고 하는 현실인식과 실천의지가 있었다. 그들은 제호 "개벽" 속에 '세계개조'의 시대사조와 동학 천도교의 '후천개벽' 전통을 오버랩시켰으며, 제호 속에 '천도교의 입장에 선 종교적 사회개조'라는 지향을 투사시키고 있었다.

  "개벽" 주도층이 러셀의 주장에 관심을 가진 것은 "동아일보"나 "조선일보" 등이 러셀에 대해 관심을 가진 것과 동일한 맥락에 있다. 중국에 머물면서 활동하던 러셀의 갑작스런 사망설로 인해 사람들이 커다란 충격을 받은 사실, 그가 자본주의 문명 및 서구 열강에 대한 비판적인 발언과 행동을 했던 점, 그리고 소련 방문 후 볼셰비즘 비판활동을 수행했던 점 등을 중요한 요인으로 꼽을 수 있다. 그러나 "개벽" 주도층이 러셀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가진 이유는 그렇나 러셀의 행적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러셀의 사회개조론이 "개벽" 주도층들에게 '결핍된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사회개조의 유일한 방법은 교육, 결혼, 종교 등에 구현된 바와 같은 인간의 창조적 충동을 가장 발달시키는 신사회제도를 수립하는 데 있다'는 러셀의 주장은 그의 화려한 사회활동 및 투쟁경력, 세계에 대한 영향력과 함께 매력적인 것으로 비쳤음에 틀림없다.  ...러셀의 사회개조론은 '인내천주의'라는 종교사상 차원의 논의에 결핍된 사회사상적 요소를 가진 것으로 주목되었다. (허수, "식민지 조선, 오래된 미래", 158~164쪽)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줄알았다甲


무역자유화인가 무역과 산업정책의 적극적 결합인가? 텍스트라는 감옥

1967년 5월 24일 경향신문 1면. 무역자유화라고 읽고 무역정책과 산업정책의 결합이라 읽는다.

  1967년 4월 GATT 가맹에 따라 무역자유화는 피할 수 없는 인식이 공유되었다. 문제는 그 시기와 자유화의 폭에 관한 것이었으며 '급진론 대 점진론'이라는 도식으로 나타났다. 급진론의 최선봉에 선 것은 경제기획원과 유솜이었으며 여기에 재무부와 무역협회가 가담했다. 이들이 무역자유화를 서두른 이유는...재정안정계획과 관련이 있었다. ...이와 같은 인플레이션 압력을 완화하기 위해서 소비재를 수입함으로써 외화를 환수하려고 했다.

  ...실제로는 무역자유화라는 정책 그 자체에 대한 합의가 형성되었다기보다는 오히려 여러 세력들의 동상이몽이라는 측면이 강했다. 다음으로 점진론이나 신중론에 관해서는 상공부의 입장이 대표적이었다. 상공부도 무역자유화 자체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았으나 국내산업 보호나 국제수지 방어를 위해 자유화 시기나 폭에 있어서 좀 더 신중하고 점진적으로 진행시켜야 한다고 보았다. 나아가 국내 물가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무역자유화보다 특관세 폐지가 앞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포지티브제에서 네거티브제로의 제도 변경은 무역자유화가 가져올 이해득실을 계산해서 결정했다기ㅣ보다는 애초 무역자유화와는 상관없는 재정안정 계획을 준수하기 위한 통화환수라는 다른 목적을 위해 기도되었다. 따라서 이 정책은 장기적 시야에 따른 정책 변경이었다기보다 단기적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 ...실제로는 무역자유화에 대해 집착하지 않았고 큰 관심도 없었따. 

  ...이러한 제도 변경이 이후의 한국의 무역정책을 자유주의적으로 이끌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 이번의 무역자유화의 의의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점차 특관세 폐지와 탄력관세제도 채택이라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결국 1967년 11월에 탄력관세제도를 도입하게 되었다. 탄력관세제도는 수입자유화를 여건으로 하여 국내산업보호와 국제수지의 방어를 목적으로 하는 ... 경제개발형 관세정책이었다. 

  이와 같이 무역자유화는 한국 경제를 자유무역체제로 이행시키기 위한 것이었다기보다는 무역정책과 산업정책을 결합시키는 새로운 산업정책의 시작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기미야 다다시, "박정희 정부의 선택", 249~256쪽)

1990년대 초, 기로에 선 한국 노동계급 텍스트라는 감옥


  1987년 여름 이후 약 2년간 지속된 미증유의 노동투쟁은 한국 노동계급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이 시기 발생한 많은 노사갈등은 개별 기업을 넘어서는 연대를 보여주었고, 노동자들의 요구는 고양된 계급이해에 대한 인식과 권리의식을 표현했다. 현장에서 힘의 균형이 노동쪽으로 기울었고, 많은 경영자들은 사업장에서의 현장통제권을 노조에게 양도해야 했다. 

  그러나 1990년대에 이런 발전을 중단 혹은 후퇴시키는 중요한 변화가 발생했다. 1990년대 들어 국가는 노사관계 안정을 위한 새로운 시도를 했고, 자본 역시 노동에 대한 통제를 다시 확보하기 위해 새로운 공세를 폈다. ... 또한 산업구조와 세계경제에 한국 노동운동에 불리한 변화가 나타났다. ... 향상된 경제조건과 개선된 공장 내의 노사관계가 산업노동자들의 집단적 정체성과 의식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국가의 노동통제 부활에 힘입어 자본은 조직노동에 대한 공세를 시작했다. ...넷째, 자본가들의 이데올로기 공세가 더 강해지고 교묘해졌다. 전투적인 노조운동에 비우호적인 분위기를 전국적으로 조성하기 위하여 자본가들은 언론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 언론의 지배적인 논조는 한국 경제사정의 악화가 노동자들의 책임이라는 "노동자 책임론"을 반영하는 것으로, 노사분규와 임금상승이 한국기업의 경쟁력 약화요인이라고 비난하면서 암묵적으로 정부의 노동탄압을 지지하는 것이었다.

  또한 국가는 다물 민족주의를 통한 새로운 이데올로기 캠페인을 시작하였다. 1990년대에 나타난 다물 이데올로기는 노동자들을 상대로 한 이념교육에서 자주 활용되었다. 단군사상에서 도출된 상대적으로 새로운 이 이데올로기는 강한 민족주의적 국수주의적 성격을 지녔다. 빠지는 곳이 없다. 다물 민족주의는 한국이 고대에 만주를 포함하여 광대한 영토를 차지했다는 점과 선조들이 빛나는 문화를 발전시켰다는 점을 상시킨다. 다물 민족주의는 한민족의 위대한 역사와 문화를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이를 위해 노동자들은 국가와 경제가 항상 경쟁적인 적대적인 국제체제에서 차지하는 위태로운 위치를 이해할 필요가 있으며, "작은 불만, 작은 분노, 작은 슬픔에서 벗어나 역사를 이루는 주체세력으로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구해근,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 267~273)


'불만 가득한 그 입, 다물어라'라고 해서 다물 민족주의(낄낄낄)

한 사람의 집은 그의 성(城), 근세 유럽의 밤과 가정의 요새화

본문의 내용과 비슷한 에단 호크 주연의 "더 퍼지"(2013). 는 적당한 짤방이 없었음을 고백합니다. 



  수 없이 많은 전조가 저녁이 다가옴을 예고했다...금잔화는 꽃잎을 닫기 시작했다 .까마귀 떼는 둥지로 돌아갔고 토끼들은 더 생기가 돌았다. 보통 타원형인 염소와 양의 눈동자는 둥글게 보였다. "염소의 눈이 나의 시계"라고 울리히 브레커는 스위스에서 목동일을 하던 젊은 시절을 회상했다. ... 새벽을 노래하는 찬사와 비교할 때 문학이나 편지에나 일기에나 그 시대 사람들은 일몰에 그리 감탄하지 않았다. 경외심보다는 불안감이 자리를 잡았다. 

  밤에 만연해 있던 공포에도 가정은 전혀 무력하지 않았다. 공공기관에서 보호해주지 않아도 사랃믈은 스스로의 힘에 크게 의존했다. 모든 사람들이 힘을 보탰지만, 가정을 돌보고 보호하는 의무는 남자 가장의 몫이었다. 저녁이 되면 제일 먼저 빨래와 연장을 안으로 거두어 들인 뒤 잠자리를 만들었다. ...작가 장 파울은 바이에른에서 보낸 유년 시절을 이렇게 회상했다. "우리 거실에 불이 켜지면 동시에 요새가 되었다. 즉 덧문을 내리고 걸쇠로 잠근 것이다." 어린 아이는 "이 창문의 총안과 흉벽 뒤에서 포근하게 보호받고 있다고 느꼈다." 

  1675년 "농업 체제"의 저자는 쇠로 만든 날카로운 대못을 바닥에 깔고 그 주위에 구리로 만든 철사 덫을 쳐두고 "밤에는 못과 덫이 보이지 않도록 하라"고 충고했다. 1694년 영국의 한 발명가는 "도둑이 침입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어떤 집이든 편리한 장소에" 설치할 수 있는 '밤의 엔진'을 고안했다. 이 기계의 정확한 성질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아마도 한 세기 뒤 런던의 윌리엄 햄릿이 선전했던 또 다른 '기계'의 전신이었을 것이다. 넓은 틀에 종과 줄을 거미줄처럼 얽어놓은 햄릿의 장치는 도둑이나 화재를 경고하는 소리를 내는 것으로 광고되었다. (로저 에커치, "밤의 문화사", 135~140쪽)

식민주의 사학의 내면화, 반도가 아닌 대륙 텍스트라는 감옥


  하지만 다른 방향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바로 한국사가 반도의 역사가 아니며 대륙에서 전개된 역사라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한국사의 '열등성'을 부정하고자 고대의 '우리 역사'가 전개된 공간을 '반도'가 아닌 '대륙'에서 찾고자 부단히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는 '반도의 역사는 열등하다'는 일제의 식민주의 사관의 그릇된 명제를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들의 시도는 결과적으로 반도적 성격론의 극복이 아닌 내면화에 다름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상고시대에 존재하였던 '거대하고 강력했던 조국'을 그려보는 것은 달콤하고 유혹적이었다. 결국 겉으로는 식민주의 사학을 격렬하게 비판하고 거부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식민주의 사학의 이론을 그대로 자기화한 기괴한 쇼비니즘이 탄생하게 되었다. (기경량, "한국 고대사와 사이비 역사학", 26쪽)

술땀 뺐더니 주말이 다가고... 휘발 직전의 단상

개 ssibal 학 ㅜㅜㅜㅜ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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