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TE로 흘러가는 주말... 휘발 직전의 단상

뭐해야 하나... 의욕없노...

수업에 대한 예의? 휘발 직전의 단상

아침에 NC 이호준 인터뷰를 잠깐 보다가... 야구에 대한 예의를 말하던데,,, 내가 할 수 있는 수업의 예의? 라는 것이 있을까? 있다면 무엇일까라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철저한 수업준비? 학생들과의 교감? 철저한 훈육? 목표도 없이 소모되어가며 배나온 아재로 귀결될 것인가?

무기력하구나 휘발 직전의 단상

쇼 미 더 열정... 또르르

그냥 그런 하루 휘발 직전의 단상

왜 그런날이 있지 않은가. 아무것도 하기 싫은데 세상 만사가 계속 시비를 걸어오는 것만 같고 믿었던 구석마저 삭아 무너져내리는 기분. 오늘도 그런 날중에 하나인데. 뭐 그냥 그런 하루려니하고 일찍 자야지 별 수 있나...

역시 개학은 힘들구나 휘발 직전의 단상

학생들은 악마의 모습 그대로고,, 나는 수업 준비 안되어있고,, 언제 수업 준비해서 언제 강의하지 헐...(좆망입니다..)

방학 중 마지막 사치, 자루 우동 식탐의 기록

제가 좋아하는 자루 스타일의 사누키 우동입니다. 모밀국수처럼 장에 찍어먹습니다.
이제 급식 먹을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심지어 내일 메뉴는 카레라이스라고 한다...


미국의 소비적 근대성? 텍스트라는 감옥

1944년 코카콜라 지면광고

   근대성의 근대화는 네덜란드의 상인적 근대성에서 영국의 산업적 근대성을 거쳐 미국의 소비적 근대성으로 진화했다는 것이다. ...'모두를 위한 대중소비'를 약속한 미국의 소비적 근대성은 모더니즘 건축양식에서 드러나는 안락에 대한 경멸과 대조적으로 (핵가족을 위한) 소비적 안락이 '집중된' 장소로서의 '교외 주택+쇼핑몰'로 상징되는 일상적 '안락의 민주화'를 표상한다.

  1950년대의 대중노동자는 교외로 이주해 중산층적 생활양식에 참여할 수 있었다. 자가보유는 미국 주거문화의 핵심적인 특징이 됐다. 1970년대 말 미국노총동연맹-산별노조회의 조합원의 3/4 가량이 자가 보유자였다. ... 숙련노동자의 경우 1920년대부터 교외 주택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지만, 반숙련 대중노동자의 경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대량생산된 교외 주택 '레빗타운'을 통해 교외 생활을 시작했다. 

Levittown의 대표적 이미지. 심시티 하고 싶네 갑자기.

  가정성의 이상에 걸맞은 소비윤리의 발명에도 불구하고 소비가 문화적 데카당스의 흔적에서 자유로웠던 것은 아니다. 여성은 소비자의 정체성을 가질수록 근대적 진보의 추구에는 부적절한 존재로 남아야 했다. 소비에서 데카당스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서는 소비를 합리적으로 계획된 행위로 재개념화해야했다. 예컨대 여성 소비자를 감성적인 대중이 아니라 가정을 기업처럼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가사 관리자, 즉 가족을 위한 '구매담당자'로 재정의해야 했다. (안정옥, '소비적 근대성과 사회적 권리', "미국의 세기는 끝났는가?", 99~106쪽)


주부들이 주로 시청할 것으로 간주되는 '아침 방송'은 미국식 소비윤리와 닿아있지 않을까? 

1950년대, 베트남에 파견된 중국 고문단 텍스트라는 감옥


  1950년 이후 베트민의 전쟁 전략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은 점점 강해졌다. 중국의 영향은 베트남 내부 정책의 변화에서도 감지되었다. 1950년대 중반부터 마오식 복장의 중국의 혁명 구호를 줄줄 쏟아내는 중국 간부들이 대규모로 도착하여...베트남인 동지들에게 조언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중국을 떠나기 전 류사오치는 고문단에게 중국식 기술을 베트남에게 강요하지 말라는 신중한 지침을 내렸으나, 일부는 그 지침을 무시함으로써 오래전부터 북부의 사촌 국가의 오만한 태도에 예민하게 반응하던 베트남의 하급 공직자나 간부들의 원성을 샀다.

  많은 베트남인들에게 중국의 영향력이 증대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성가신 일은 새로 생긴 당원 이데올로기 훈련 프로그램이었다. 이 프로그램의 목표는 마오의 이론에 따라 당원들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재교육하는 것이었다. ...부다렐은 이런 정책들이 두 가지 부정적인 결과를 낳았다고 지적한다. 단기적으로 볼때 많은 애국적 지식인들이 운동에 등을 돌렸으며 그 전에 당 내에 존재하던 온건파와 급진파 사이의 유대를 깨뜨렸다. ...베트민을 배반한 사람들은 그들이 운동을 떠난 이유로 마오 쩌둥 사상의 과도한 영향을 지목하는 경우가 많았다.

  중국의 영향은 농촌 마을까지 확대되었다. ...1946년 12월 전쟁 발발 이후의 정부의 토지 정책은 반봉건 혁명보다 반제국주의 투쟁을 앞세우라는 호치민의 결정을 반영하고 있었다. ...애국적 지주나 부농의 경우에는 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땅을 몰수하지 않았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진행 중인 좀 더 급진적인 토지개혁을 경험한지 얼마 안되는 중국 고문단은 베트남 간부들에게 농촌의 '봉건적' 요소들과 좀 더 과감하게 맞설 것을 촉구하기 시작했다. 감놔라 배놔라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젓가락질로 봤을때...배우신 분 류사오치.(어째 심현섭 같다)

천도교와 버트런드 러셀 텍스트라는 감옥

허수 교수는 "개벽" 표지에 다양한 이미지와 상징적 성격이 "천도교의 종교적 전통과 일정하게 관련"된다고 보았다. (출처는 국립중앙도서관)


  여기서 보았듯이 천도교 청년회 간부들이 "개벽"을 창간한 목적은 '세계개조의 동향을 주시하여 우리 사회를 개조하는 것'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목적 이면에는 이돈화가 1919년 말에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금일 이후의 개조는 반드시 종교적 개조가 되리라'고 하는 현실인식과 실천의지가 있었다. 그들은 제호 "개벽" 속에 '세계개조'의 시대사조와 동학 천도교의 '후천개벽' 전통을 오버랩시켰으며, 제호 속에 '천도교의 입장에 선 종교적 사회개조'라는 지향을 투사시키고 있었다.

  "개벽" 주도층이 러셀의 주장에 관심을 가진 것은 "동아일보"나 "조선일보" 등이 러셀에 대해 관심을 가진 것과 동일한 맥락에 있다. 중국에 머물면서 활동하던 러셀의 갑작스런 사망설로 인해 사람들이 커다란 충격을 받은 사실, 그가 자본주의 문명 및 서구 열강에 대한 비판적인 발언과 행동을 했던 점, 그리고 소련 방문 후 볼셰비즘 비판활동을 수행했던 점 등을 중요한 요인으로 꼽을 수 있다. 그러나 "개벽" 주도층이 러셀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가진 이유는 그렇나 러셀의 행적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러셀의 사회개조론이 "개벽" 주도층들에게 '결핍된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사회개조의 유일한 방법은 교육, 결혼, 종교 등에 구현된 바와 같은 인간의 창조적 충동을 가장 발달시키는 신사회제도를 수립하는 데 있다'는 러셀의 주장은 그의 화려한 사회활동 및 투쟁경력, 세계에 대한 영향력과 함께 매력적인 것으로 비쳤음에 틀림없다.  ...러셀의 사회개조론은 '인내천주의'라는 종교사상 차원의 논의에 결핍된 사회사상적 요소를 가진 것으로 주목되었다. (허수, "식민지 조선, 오래된 미래", 158~164쪽)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줄알았다甲


무역자유화인가 무역과 산업정책의 적극적 결합인가? 텍스트라는 감옥

1967년 5월 24일 경향신문 1면. 무역자유화라고 읽고 무역정책과 산업정책의 결합이라 읽는다.

  1967년 4월 GATT 가맹에 따라 무역자유화는 피할 수 없는 인식이 공유되었다. 문제는 그 시기와 자유화의 폭에 관한 것이었으며 '급진론 대 점진론'이라는 도식으로 나타났다. 급진론의 최선봉에 선 것은 경제기획원과 유솜이었으며 여기에 재무부와 무역협회가 가담했다. 이들이 무역자유화를 서두른 이유는...재정안정계획과 관련이 있었다. ...이와 같은 인플레이션 압력을 완화하기 위해서 소비재를 수입함으로써 외화를 환수하려고 했다.

  ...실제로는 무역자유화라는 정책 그 자체에 대한 합의가 형성되었다기보다는 오히려 여러 세력들의 동상이몽이라는 측면이 강했다. 다음으로 점진론이나 신중론에 관해서는 상공부의 입장이 대표적이었다. 상공부도 무역자유화 자체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았으나 국내산업 보호나 국제수지 방어를 위해 자유화 시기나 폭에 있어서 좀 더 신중하고 점진적으로 진행시켜야 한다고 보았다. 나아가 국내 물가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무역자유화보다 특관세 폐지가 앞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포지티브제에서 네거티브제로의 제도 변경은 무역자유화가 가져올 이해득실을 계산해서 결정했다기ㅣ보다는 애초 무역자유화와는 상관없는 재정안정 계획을 준수하기 위한 통화환수라는 다른 목적을 위해 기도되었다. 따라서 이 정책은 장기적 시야에 따른 정책 변경이었다기보다 단기적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 ...실제로는 무역자유화에 대해 집착하지 않았고 큰 관심도 없었따. 

  ...이러한 제도 변경이 이후의 한국의 무역정책을 자유주의적으로 이끌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 이번의 무역자유화의 의의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점차 특관세 폐지와 탄력관세제도 채택이라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결국 1967년 11월에 탄력관세제도를 도입하게 되었다. 탄력관세제도는 수입자유화를 여건으로 하여 국내산업보호와 국제수지의 방어를 목적으로 하는 ... 경제개발형 관세정책이었다. 

  이와 같이 무역자유화는 한국 경제를 자유무역체제로 이행시키기 위한 것이었다기보다는 무역정책과 산업정책을 결합시키는 새로운 산업정책의 시작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기미야 다다시, "박정희 정부의 선택", 249~2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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