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불킥 no.3 휘발 직전의 단상

잘하는 편은 아니지만 나는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한다. 지금이야 코인노래방도 있고 혼자서 노래방 가는 문화도 있지만 학창시절에는 돈도 없고 혼자서 노래방가기도 힘드니까 샤워를 하면서 노래를 많이 불렀던 것 같다. 무엇보다도 화장실은 최고의 에코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은가. 아니 근데 노래 부르는 이야기는 왜 하냐고? 꽤 오래전 기억인데 나의 이불킥 흑역사에서 사라지지 않는 기억이 샤워하면서 노래 부르는 것과 관련 있기 때문이다.


Lonely Night Lonely Night. 떠나던 그 모습이 남았던.

 

맞벌이를 하던 부모님은 학원 보다는 학습지를 선호했던 것 같다. 나도 학원가는 것 보다는 집에서 빈둥대다가 선생님 오시기 전에 밀린 학습지를 빡세게 하는 스타일을 좋아했다. (벼락치기 좋아하는 지금 성격의 형성기였던 것 같다.) “눈높이재능으로 양분되어 있던 당시 학습지 시장에서 부모님은 자기의 일은 스스로 하자는 재능수학과 재능한자를 선택했다.(재능한자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판명났고 재능수학은 효과가 없는 것으로...)


학습지 선생은 1주일에 1번씩 왔던 거 같다. 한자 1, 수학 1. 고로 1주일에 2번은 학습지 선생을 만났던 셈이다. 그런데 나 말고도 동생까지 학습지를 했으니까 1주일에 3~4번은 선생이 우리 집에 왔다. 당시 우리는 거실에 있던 밥상 겸용 옻칠상에 앉아서 공부를 했다. 선생이 뿌린 진한 향수 냄새에 어질어질해진 머리를 붙잡고 선생의 수학 원리 설명을 따라갔다.

 

사건이 터지던 날은 매우 더운 여름이었다. 동생은 아마 거실에서 학습지 선생을 기다리며 남은 부분을 마저 공부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냉수 샤워로 열기를 가시려고 욕실로 들어섰다. 아마 97년이었을 것 같다. 남자라면 락발라드 아닌가. 욕실 노래방의 선곡은 부활의 <Lonely Night>. 뭐시라 론리 나잇? 박완규가 싱싱한 성대를 자랑하던 시절의 그 론리 나잇?

 

곡을 잘 부르기 전에 우선 곡을 분석해야 한다. 그때 체득했던 것 같다. 아 이건 두성이다, 이건 흉성이다. 이 부분은 머리 위로 소리를 공명해서 내고 이 부분은 몸 전체를 써서 소리를 내야 하는구나. 이 부분 부르기 전에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질러야 하는구나. 그렇게 되뇌이며 몇 번씩을 반복해서 불렀다. 지금 생각해보면 무슨 부활 보컬 오디션 보는 것처럼 불렀다. 그런데 후렴구 부분은 역시나 마의 난이도다. 론리 나잇! 론리 나잇! 떠나던 그 모습이 남았던!! 호흡도 어렵고 정확한 발음도 어렵고. 몇 번을 해봤지만 어려워서 그만 두고 말았다. “에이 이 노래는 너무 어려워. 빨리 씻고 나가서 대항해시대2 해야지 낄낄.”

 

욕실 문을 열고 나가자 웃음소리가 나를 반겼다. 욕실 앞 거실에서 동생과 학습지 교사가 같이 수업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욕실 노래방이 실시간 스트리밍으로 그들에게 전송되고 있었다. 그것도 FLAC 음질로. 황급히 욕실 문을 닫고 욕조 속으로 들어갔다. 욕조에 담겨 있는 물의 깊이가 코 박고 자살하기에 퍽 괜찮아 보였다. 더 창피했던 건 욕실 나올 때 알몸에 수건으로 중요 부위만 가렸던 것. 알몸과 노래 부르기 콤보라니... 진짜 이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어서 아직도 이불킥 like 베컴을 하곤 한다.

 

그나저나 당시 학습지 선생의 발냄새가 잊혀지지 않는다. 선생은 강한 향수 냄새로 고단한 노동을 감추려고 했던 것 같다. 우리 집에는 저녁 6시 정도에 주로 찾아왔었는데 낮 시간에 아마도 아파트 단지를 엄청 돌아다녔을 것이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 선생도 참 고단한 삶을 살았던 거 같다. (그러고 보니 재능교육 사태가 생각나네


학습지 선생하고 마지막 수업이 아직도 기억난다. 다음 주 부터는 다른 선생님이 오실 거라며 그동안 선생님 잘 따라 와줘서 고맙다는 짧은 인사를 하고 돌아가던 선생을 아파트 복도에서 꽤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잘 살고 있겠지.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데 그 향수냄새랑 발냄새가 이상하게 머릿속에 강하게 남아 있다. 그때 나의 흑역사가 고단했던 선생의 인생에 재미있는 에피소드였으면 하는 바램이다


이 글을 쓰다보니 재능교육 사태가 생각이 나서 관련 기사 링크를 걸어둔다.

 

이상으로 감동으로 흑역사를 은폐하려는 포스팅을 마칩니다.   


덧글

  • nakbii 2016/02/22 21:38 # 답글

    저도 비슷한 에피소드가 있었는데.. 저는 프링글스 통에 대고 노랠 불렀다지요..
  • 섹사 2016/02/22 21:56 #

    어이쿠나 그 귀한 걸 ㅠㅠ
  • あsdf 2016/02/23 15:14 # 삭제 답글

    필력이 수준이상...!!
  • 섹사 2016/02/23 16:05 #

    헤헤 감사합니다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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